그 진아를 투명하게 대면한다는 것, 그것은 페르소나에 가려진, 억압된, 온통 깨지고 터진, 성한 데가 한군데 없는 또 다른 나와, 그러므로 어쩜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경험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기 반성적이다. 불교의 면벽수행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끊임없이 똑같은 물음을 묻는다. 명상 수행하는 사람을 끝도 없이 반영하는 거울 방이 이런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그러므로 종래에는 대긍정에 이르고 싶은 존재론적 욕망을 표상할 것이다. 궁극에는 그 욕망마저 무화되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어떤 경지며 차원을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주체며 실존적 자아는 온통 깨지고 터진, 성한 곳이 한군데 없는 상처투성이다. 형태가 그렇고, 표면질감을 갈아내는 과정에서 유래한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그렇고, 얼룩덜룩한 색채감정이 그렇다. 상처를 내재화한 존재, 그러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침묵의 소리며 내면의 소리를 응축한 존재를 표상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엔 파토스의 기운이 감돈다. 그러면서도 격렬하지는 않은데, 동작을 억제하는 최소한의 형태가, 자기 내면을 향해 열리는 응축된 형태가,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무슨 표정을 표현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무표정한 표정, 그러므로 어쩜 관조적인 표정이 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시종 <침묵의 소리>를 주제화한다. 바로 자기 내면의 소리, 심연의 밑바닥에서 진아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그 귀 기울임을 작업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자기 개인의 내면적 성찰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성찰과도 통하는 것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특히 인간실존의 실체를 다름 아닌 상처로 보는 것이 공감을 얻는다.
한편으로 이처럼 깨지고 터진 형태, 비정형의 스크래치, 그리고 얼룩덜룩한 색채감정이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상처를 표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 시간을 표상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자기 속에 오랜 시간을 머금고 있는 부장품이며 발굴된 유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심연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비의(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은 알고 보면 상처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를 발굴하고 캐내는,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외화 하는, 잊힌 자기며 아득한 자기와 대면하게 해주는 작업의 주제의식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잊힌 자기며 아득한 자기를 현재 위로 되불러오기 위해 시간을 차용한다. 전통적인 목가구로 좌대를 대신한 것이다. 그 꼴이 무슨 골동처럼도 보이고, 부장품처럼도 보이고, 그 자체 시간의 화신처럼도 보인다.
작가를 특집으로 다룬 매체가 빼 올린 타이틀이 흥미롭다. 깨고 깨는 조각가다. 멀쩡한 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는 조각가며, 이로써 궁극에는 자기를 깨는 조각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이 분명해졌다. 굳이 멀쩡한 조각을 깨트리는 작가의 무모한(?) 행위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자기며 인간실존과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종래에는 거짓 자기를 깨트려 진정한 자기(진아)와 만나지는 기획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개 독립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지만, 때로 온통 깨지고 터진 조각조각들을 하나의 철망 케이지 속에 넣어 집적한, 그 위에 토르소를 얹은, 그래서 불완전한 것들의 몸통으로 축조된 또 다른 실존적 인간을 예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