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SE-WHUN

앞서보기와 먼데서 보기

코로나 펜데믹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을 바라본다. 어쩌면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너 자신을 바라 보라”, 너의 허물을 새겨 보라.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계기로 삼고,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묻는 시간을 만들어라. “지금은 나돌아 다니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Face시리즈는 이러한 펜데믹시기에 혼자 작업하는 시간에 나온,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형태는 단순하게 생략되고, 두 눈만 말똥말똥한 인간의 우화이며 나약한 인간의 본 모습을 표현하였다.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림에 치친 영혼은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깊게 패인 눈 속을 들여다보라, 그 곳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아름답게만 보려거든 한 발짝 먼데에 서서 그들을 보면 된다. 점토작업 후 유백색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마친 다음 다시 한번 흰색의 미세한 흙물을 붓으로 발라서 문질러 광택을 내고, 1000℃정도에서 소성하면 자연스러운 광택의 표면질감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테라 시질라타이다. 
 다른 작업으로 섬 시리즈 연작을 선보인다. 섬 속에는 무수한 삶들이 존재한다. 생명이 꿈틀거리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그 속에는 언제나 지속되어왔다. 우리는 멀리서 섬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섬은 언제나 고요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지구촌도 마찬가지다. 멀리 우주선에서 바라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푸른 위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의 삶은 치열하고, 전쟁과 공포와 애욕의 현장이 들어있다. 그래서 세계의 부호들은 지구 밖에서 바라보는 여행에 수억의 경비를 들이고 남들이 볼 수 없는 지구 관람권을 사고 있다.
나는 이러한 섬의 속성을 인간시대에 접목하여 작업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가까이 보면 리얼한 인간들과 오염에 몸살이 나는 땅덩어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조금씩 물러나면 섬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무엇을 닮은 것 같은 섬들이 올망졸망 물위에 부유해 있다.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다. 가까운 주변에 누군가 파괴하고, 버리고, 배설하는 욕구를 지속하고, 누군가는 건설하고, 설거지하고 치우는 힘든 일을 해야 하는 끊임없는 윤회를 지속한다. 이 모든 일은 우리 가까이에 보이는 일상이다. 작품은 시대를 반영하고 그 자체적으로도 아름다워야 하는 절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자의 기법들은 실로 유용하다. 
유약을 바르고, 다시 연마하는 과정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작업에 대응시켜보는 것이다.  섬 들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고요하고 아름답다. 물속에 드리우는 잔영은 무엇으로 표현하기가 쉽지않다. 처음에는 잔영의 이미지를 실로 표현해 보았다.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우연히 군번줄이 눈이 띄게되어 작업에 매칭해 보았다. 금속의 적당한 광택과 무게감이 주는 선들이 자연스러워서 만족스럽다.
-  작가노트 중에서

이세훈의 작업
깨지고 터진,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여기에 이빨 빠진 머그잔이 있다. 게다가 살짝 찌그러져 있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마시는 데는 문제가 없다. 머그잔의 기능에는 부합하지만 머그잔과 관련한 상식과 합리적 형상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을 대변해줄 상징과도 같은 이 이 빠진 머그잔을 그렇다면 작가는 왜 만들었을까. 이 의도적인 미완, 이 계획적인 실패(?)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작가의 작업은 상식과 합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식과 합리가 뭔가. 누가 상식과 합리를 정의하는가. 롤랑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렇게 알고 보면 문화도, 미적 관습도 이데올로기 아닌 것이 없다. 사회가 용인할 만한, 공적 영역의 바운더리를 설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 긋기가 상식이고 합리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건 어쩜 모든 개별성을 말살하는 제도의 기획이다(인정하기는 싫지만, 제도의 유토피아는 모든 개별성이 말살된, 도구화된 효율성으로 추동되는 마치 군대와도 같은 사회다). 어떤 개별 어쩜 모든 개별은 범주화되지도 보편화되지도 개념화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범주와 보편과 개념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지정학적 위치는 바로 그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경계 위에 있고, 그 경계에서의 형식실험을 통해 모든 범주와 보편과 개념을 항상적으로 재설정하는 것(그러므로 예술은 불안정하다)에 예술의 존재의미가 있고 실천논리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쩜 의도적인 미완을 매개로 완성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말년의 미완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현대적으로 보이고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보인다. 그때와 지금의 미적 관습이 다른 것이고, 완성의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작가의 작업도 그럴까. 적어도 기획 자체만 놓고 본다면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런 개념의 재설정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의 작업은 세라믹이다. 재료와 기법을 전용했을 뿐 사실상 도조다. 세라믹 재료와 기법을 전용한 조각이다. 세라믹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합치되는 것에 작가의 작업의 특수성이 있고 아이덴티티가 있다. 소성 후 표면의 유약을 갈아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수행하면서 작가 고유의 형태를, 질감과 색채를 만든다. 

그 중 형태를 보자면 대개는 좌선하는 불상과 나한상, 그리고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멀쩡한 것이 하나 없다. 하나같이 깨지고 터진 형상들이다. 팔 한쪽이 떨어져나간, 어깨 죽지가 깨진,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형상들이다. 여기에 이목구비도 분명치 않은 것이 두루뭉술한 동자승이나 석상을 보는 것 같다. 깨지고 터진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명상 수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내면을 투시한다는 것이며, 자기 내면의 또 다른 자아(어쩜 불교의 진아)와 만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이중 분열되는데, 외면적 정체성이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내면적 정체성이 아이덴티티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어원에서 왔다.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 제도적 주체, 타자가 욕망하는 주체,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주체다. 그 주체가 가면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나를 본적도 볼 수도 없다. 나, 그러므로 어쩜 진아는 언제나 그 가면 뒤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 진아를 투명하게 대면한다는 것, 그것은 페르소나에 가려진, 억압된, 온통 깨지고 터진, 성한 데가 한군데 없는 또 다른 나와, 그러므로 어쩜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경험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기 반성적이다. 불교의 면벽수행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끊임없이 똑같은 물음을 묻는다. 명상 수행하는 사람을 끝도 없이 반영하는 거울 방이 이런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그러므로 종래에는 대긍정에 이르고 싶은 존재론적 욕망을 표상할 것이다. 궁극에는 그 욕망마저 무화되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어떤 경지며 차원을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주체며 실존적 자아는 온통 깨지고 터진, 성한 곳이 한군데 없는 상처투성이다. 형태가 그렇고, 표면질감을 갈아내는 과정에서 유래한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그렇고, 얼룩덜룩한 색채감정이 그렇다. 상처를 내재화한 존재, 그러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침묵의 소리며 내면의 소리를 응축한 존재를 표상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엔 파토스의 기운이 감돈다. 그러면서도 격렬하지는 않은데, 동작을 억제하는 최소한의 형태가, 자기 내면을 향해 열리는 응축된 형태가,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무슨 표정을 표현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무표정한 표정, 그러므로 어쩜 관조적인 표정이 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시종 <침묵의 소리>를 주제화한다. 바로 자기 내면의 소리, 심연의 밑바닥에서 진아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그 귀 기울임을 작업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자기 개인의 내면적 성찰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성찰과도 통하는 것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특히 인간실존의 실체를 다름 아닌 상처로 보는 것이 공감을 얻는다. 

한편으로 이처럼 깨지고 터진 형태, 비정형의 스크래치, 그리고 얼룩덜룩한 색채감정이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상처를 표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 시간을 표상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자기 속에 오랜 시간을 머금고 있는 부장품이며 발굴된 유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심연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비의(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은 알고 보면 상처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를 발굴하고 캐내는,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외화 하는, 잊힌 자기며 아득한 자기와 대면하게 해주는 작업의 주제의식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잊힌 자기며 아득한 자기를 현재 위로 되불러오기 위해 시간을 차용한다. 전통적인 목가구로 좌대를 대신한 것이다. 그 꼴이 무슨 골동처럼도 보이고, 부장품처럼도 보이고, 그 자체 시간의 화신처럼도 보인다.  

작가를 특집으로 다룬 매체가 빼 올린 타이틀이 흥미롭다. 깨고 깨는 조각가다. 멀쩡한 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는 조각가며, 이로써 궁극에는 자기를 깨는 조각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이 분명해졌다. 굳이 멀쩡한 조각을 깨트리는 작가의 무모한(?) 행위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자기며 인간실존과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종래에는 거짓 자기를 깨트려 진정한 자기(진아)와 만나지는 기획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개 독립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지만, 때로 온통 깨지고 터진 조각조각들을 하나의 철망 케이지 속에 넣어 집적한, 그 위에 토르소를 얹은, 그래서 불완전한 것들의 몸통으로 축조된 또 다른 실존적 인간을 예시하기도 한다. 

작가를 특집으로 다룬 매체가 빼 올린 타이틀이 흥미롭다. 깨고 깨는 조각가다. 멀쩡한 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는 조각가며, 이로써 궁극에는 자기를 깨는 조각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이 분명해졌다. 굳이 멀쩡한 조각을 깨트리는 작가의 무모한(?) 행위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자기며 인간실존과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종래에는 거짓 자기를 깨트려 진정한 자기(진아)와 만나지는 기획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개 독립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지만, 때로 온통 깨지고 터진 조각조각들을 하나의 철망 케이지 속에 넣어 집적한, 그 위에 토르소를 얹은, 그래서 불완전한 것들의 몸통으로 축조된 또 다른 실존적 인간을 예시하기도 한다. 

질 들뢰즈는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것에 예술의 특수성이 있다고 했다. 굳이 들로즈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창조적 파괴에 대한 진술은 많다. 상식과 합리로 굳어진 것들(롤랑 바르트라면 독사 doxa라고 했을)을 깨트려 재설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보편화되지 않는 개별들을 구제하고, 의미화를 거부하는 선의미들을 발굴하는 것에서 예술의 당위성이며 존재의미를 찾는 것이다. 침묵의 소리라는 주제도, 온통 깨지고 터진 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실존적 인간 군상도 이런 예술의 설천논리에 부합한다. 작가의 말처럼 의도적인 파괴로 새로운 창조적 울림을 만들어낸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 나타난 깨지고 터진 구멍들이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아님 차라리 증명)하는 상처처럼도 보이고, 자기가 깨지는 각성의 계기로도 보인다. 

Se Whun, Lee
People who broken, cracked, and meditate 
Kho, Chung-Hwan - Artcritic

Here is a mug with a chip in it. Besides, it is even slightly distorted. Nevertheless, there is no problem with drinking. It conforms to the function of the mug, but it does not fit the common sense and rational form associated with the mug. So why did the artist create a mug that lacks the same symbol as the artist 's work? What does the artist want to say through this intentional unfinished - this deliberate failure? 
It is said that the artist's work does not correspond closely with common sense and rationality. What is common sense and rationality? Who can define  common sense and rationality? Roland Barth said that myths arose when cultural facts look on as natural facts. In this sense, there is no culture, and no aesthetic custom not associated with ideology. Drawing an invisible line, which sets the boundaries of the public domain which society can tolerate, is common sense and reasonable. To put it in a little exaggeration, it is a scheme of a system that destroys all individuality. (I hate to admit it, but the utopia of the system is like an army society, driven by instrumental efficiency, with all individuality wiped out). Not every individual is categorized, universalized, or conceptualized. Therefore, all categories, universes, and concepts are temporary and arbitrary. The geopolitical position of art is on its arbitrary and arbitrary boundary, and by the experiment of form at its boundary it is always possible to redefine all categories, universes and concepts (and therefore art is unstable), and there is a logic of practice in it. 

Thus, the artist has been redefining the meaning of completion using intentional unfinished. From the present point of view it seems that Michelangelo's last years are modern, and even go ahead of the times. The aesthetic customs of that time and now are different, and the concept of completion becomes different. Is the work of the artist also same? At least for the planning itself, the artist 's work also has a similarity with the resetting of this concept.

The artist's work is ceramic. It is a sculpture making use of ceramic materials and techniques. There is a specificity of the artist 's work and an identity to be united by crossing the boundaries of ceramics and sculpture. After firing, the process of grinding the surface glaze is repeated several times to create the unique shape, texture, and color of the artist.
The Buddhist statues, disciples and people sitting in meditation are among them. However, there is nothing intact. The shapes are broken and stuck together. There are shapes with one arm falling off, a shoulder dying broken, and a hole in the chest. It seems that there is no clear obelisk here, but it looks like a young monk or a stone statue. They are people performing meditation. Right here is the key. Performing meditation is to see through one's inner side, and to meet another self (inner Buddhist spirit). Human identity is a double divide. If outer identity is a persona, inner identity is real identity. And as you know, persona came from the root of the mask. Therefore, it is the social subject, the institutional subject, the subject desiring the other, and the subject of the desire of the other. The fact that the subject is a mask is significant. So you have never seen me. I, therefore, always hid behind the mask. 

Confronting the inner Buddhist spirit transparently can be an experience to meet another ‘I’(a real ‘I’) that is hidden in the persona oppressed, broken and popped. So the artist 's work is self - reflective. Buddhist meditation practice facing the wall is constantly asking the same question – who am I? -.  A mirrored room that reflects people who perform meditation endlessly expresses this self - reflective tendency. Perhaps it will represent an ontological desire to deny denial, and thus to achieve great affirmation after all. Ultimately, the desire will even be nullified, and so the existence itself will disappear without a trace and will represent a certain level and dimension.
Such a universal human being is the ontological subject, and the existential self is fragile and wounded. The shape, the atypical scratch that comes from the process of changing the texture of the surface, and the speckled color feeling are like that. It is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ization of the wound. Therefore it may represent the silent voice that can not be uttered, and the presence of condensed inner voice. So the energy of Patos goes round the works of the artist. However, it is not intense, but there is a minimal form that suppresses the action and  a condensed form that opens toward the inner surface.  The artist, however, does the subject "silent voice". It is the sound of his inner voice, listening to the sound of the true self (Jin-a) from the bottom of the abyss, and moving his tilt to work. As such, the artist 's work is universal in that it is based on the inner reflection of one' s own individual, but at the same time communicates with the ontological reflection of universal humanity. Especially, it is getting sympathy to see the reality of human beings as a wound.

On the other hand, such broken and worn forms, atypical scratches, and speckled color emotions represent wounds as human ontological conditions, but at the same time, they represent their own times. The artist 's work is a long-lived product in him, and reminds me of excavated artifacts. It discovers and digs out sorrow sleeping on the bottom of the abyss, and it is not unrelated with the subject consciousness of the task engaging in such wounds and confronting the forgotten self. So the artist borrows time to recall the forgotten self and the present self. It is a traditional mural, replacing the chair. It looks like an antique, a product, and an incarnation of time itself.
The title that the media featuring his works chose is interesting - He is the artist of a breaking and breaking piece. He is a sculptor who expresses a wound by breaking a fine piece, which ultimately implies the meaning of a sculptor breaking the self. This has made the subject consciousness of the artist clear. The artist's reckless action(?), which breaks the fragile sculpture, is intended to express the invisible inner wounds and to hear the silent sound that can not be heard through such perforated holes. It is for such a wounded self and confrontation with the existence of human beings, and therefore it is to practice the plan which meets the true self (Jin-a) by breaking the false self in the past. So the artist usually expresses the wound by breaking the independent sculpture, but sometimes it indicates another existent human being built with the torso on top of it and the body of imperfect things.

Gilles Deleuze said that there is a distinctiveness of art in creating while destroying. There are many statements about this creative destruction, even if it is not Deleuze’s. Through the process of breaking and re-establishing common sense and rationally construed things (what would have been called Doxa in the case of Roland Barthes), it is possible to salvage the individuals that are not universal and to find the meanings of the good. The theme of the sound of silence, and the existential human group wearing wholly broken body shell are in line with the theory of the art of action logic. Like the artist's words, he intends to create a new creative resonance with intentional destruction. Thus, the broken and pecked holes in the sculptures of the artist can be seen as wounds to represent(or rather demonstrate) the ontological condition of human existence, and also as an occasion for self- awakening.

님을 향한 침묵, 이마고 데이 (Imago Dei)

흙은 세상을 이루는 근본요소이며 인간 삶의 근원이다. 때문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와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우주의 생성인자로 흙을 이야기 하였으며 동양 세계관에서도 흙(土) 은 물, 불, 바람(水,火,風)과 함께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로 보고 있다. 이로서 흙은 물질로서의 흙이 아닌 우주의 기운과 몸을 담아내는 커다란 기운생동의 본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도 흙에서 나왔다 하지 않은가!

때문에 도예가가 이 같은 흙을 만짐에 있어서 신성시 하고 유용성을 극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흙으로 그릇을 빗고, 집을 짓고, 물건을 만드는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흙은 성스러움을 간직한 고대인의 영혼이 깃든 것인지도 모른다. 흙을 통한 이 영혼의 재발견이야 말로 현대도예가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과제는 아닌가 싶다.   

이세훈의 작품을 보면 이 같은 영혼의 재발견을 위한 여러 흔적들을 볼 수 가 있다. 우선 작품의 주된 내용은 인간인데, 이 인간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인간의 모습은 대부분 여성이며 반신상 혹은 깨어진 두상, 토루소 등이다. 부자연스럽고 까칠까칠한 표면에서 고대 비너스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흙 조각과 조각으로 연결된 틈과 사이의 점철에서 인간과 만물의 생성을 연출한다. 고대 그리이스의 코린트와 아테네, 이탈리아의 로마, 에트루리아 그리고 신대륙(Pre Claumbian)의 도공들이 매우 얇고 광택이 있는 표면 질감을 얻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테라 시질라타(Terra Sigilater)의 기법은 이세훈의 도예작품 특유의 미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미감의 끝에는 고대의 뮈토스(Mythos), 즉 신화와 전설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다.

이세훈은 실용성을 위주로 하는 도예가 보다는 전통도자의 방법을 사용하되 예술적 상상력과 스토리를 조형화시키는 전형적인 현대 도예가로 작업을 일관해왔다. 작가의 예술적 스토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예 조형 속에 나타나는 ‘님’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 이다. ‘님’은 자연과 여성 그리고 모태와 유혹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는데, 구체적인 물상의 모습보다 물상의 모습이 머금고 있는 정신적 세계관에 몰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님’은 선악의 초월자로서 영원무궁 현존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서양의 예수와 동양의 석가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결코 종교에 치우침을 우선시 하지 않는다. 

「Sound of silence Ⅰ」의 경우 예수를 둘러싼 12제자가 있다. 모양으로 보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듯하다. 손은 가지런히 모으고 턱을 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고 하고 있다. 침묵으로 일관한 모습 속에서 침묵보다 더 깊은 정적이 흐르고 이들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표정도 없고 귀도 생략되었다. 알 수 없는 이들 무언의 대화 속에서 당연히 시선은 예수에게 쏠린다. 그러나 예수도 말이 없다. 곧 일어날 예수 죽음의 불안한 징후는 찾을 수 없고 안정되고 고요한 이 풍경 속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설명함으로 드러나는 객관적 세계관보다는 무언으로 교감하는 정감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Sound of silence Ⅱ」와 연관되어 있다. 등신불을 연상하게 하는 가부좌한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응시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을 설명하듯 참된 진(眞)의 세계를 탐독하는 인간상을 통하여 작가는 우리에게 오늘날 진리에 대한 역설을 보여준다.  

이세훈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또 하나의 재미는 흥분과 긴장이다. 이것은 침묵시리즈처럼  다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음으로서 더욱더 기대되는 예술 심리적 효과를 보여준다. ‘외출’ 시리즈와 ‘그날 이후’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나름대로의 화장과 의상, 모자까지 갖추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 속에서 여성은 사색하며 기다리고 또 여행을 한다. 외출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느낌, 이브의 유혹과 삶의 방식까지도 타인과 소통하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지의 형태로 이해된다. 절제하려는 듯이 지긋이 다문 입술과 앙증맞게 들고 있는 술잔의 모습까지 곧 다음에 일어날 일이 기대되는 이 장면들 속에서 현대도예가 이세훈이 생각하는 풍부한 예술적 상상력을 맛볼 수 있다. 

그간에 전시되어온 조각 같은 도예, 도예 같은 조각에서 중년 도예가 이세훈의 자연성과 역사성의 미학과 인간학에 대한 그만의 고찰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작가의 꿈은 현실을 넘어 잠재하는 꿈의 세계에 귀착되며 미완성의 조형이 더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듯 논 피니토(non finito)의 개념을 차용한 도예의 물상들에서 근대와 중세를 지나 고대의 이미지와 커뮤니케이션 하고자 함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인간이 있었다.  

작가는 현대와 고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사라진 신화를 발견하고 비밀스런 언어를 창조하며 나아가 작가와 사회, 작품과 상상력이라는 코드를 분명하게 텍스트화 함으로서 스토리를 내러티브로 발전시키고 있다. 작가의 손으로 만지고 주무르며 자르고 붙이는 조형의 작업들은 신화를 벗고 현실이 되어 작가와 동행하는 연인으로 나타나고 구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마고 데이.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끝없이 번뇌하는 자신의 형상들을 표현하고 신의 형상, 님을 향한 침묵을 쫒아 그 자체에 충실하려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일기를 인용한다. ‘흙은 강함과 부드러움 그 모든 표현을 수용한다. 그리고 불의 향연으로 작업의 심판을 받는다....이번 작업은 또 한번의 고해성사이다’ 

이유상(미술평론가, 디자인학박사)

1982  동아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1988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個人展
  1997  제1회 개인전 (부산현대아트홀)
  2003  제2회 개인전(갤러리 몽마르트)
  2004  제3회 개인전(안양문화예술원 초대)
  2008  제4회 개인전(김재선 갤러리 초대)
  2010  제5회 개인전(갤러리 몽마르트르 초대)
  2017  제6회 개인전(부산시민공원 다솜갤러리)
  2018  제7회 개인전(인사아트센터)
  2018  제8회 개인전(RAW gallery)
  2019  제9회 개인전(제뉴인갤러리)
  2020  제10회 개인전(E 웰니스갤러리)
  2021  제11회 개인전(세종갤러리)

團體 및 招待展
  1980  object 12인의 현장전
  1985 ~ 2018 동아도예가회전
  1986 ~ 2001대한산미협회전
  1988 ~ 2016 부산미술제
  1989 ~ 2018 부산도예가회전
  1991  전환된 物性 陶金展 (다다Gallely)
  1991  현대도예의 현상과 전망전 (광주, 대구)
  1991 ~ 1995  서울현대도예 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1993  한국도자조형회전 (디에아르)
  1994  오름갤러리 초대 - 봄, 오름전 (부산)
  1994  한일도예대학 29인전
  1994  한국현대도예 3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94  국제도예대전
  1997  호주 NSW대학 초청전(호주 시드니)
  1998  경계해체와 표현의 확장전(부산시립미술관 초대전)
  2000 새 천년의 소리 울림전(갤러리 세원)
  2001 세계도자 엑스포 워크샾 참가(경기도 이천 도자공방)
  2002 TEAM 일본전(후쿠이 시립미술관)
  2002 오팔 개띠전(갤러리 통 기획 초대전)
  2003 경남산업디자인 추천작가전
  2004 국제공예교류전(금정문화원)
  2005 40-움직임 33인전(갤러리 자미원초대)
  2005  APEC 기념초대전(기장도예문화관)
  2006 ‘07 부산국제환경예술제(부산문화회관)(을숙도문화회관)
  2006 양산성당 성모상 및 성물제작
  2007 갤러리 불루홀 공예작가 초대전(갤러리 불루홀)
  2007 경남산업디자인추천작가전
  2008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부산시립미술관개관10주년 기념전)
  2008 가톨릭미술인회원전(부산디자인센터)
  2008.4.30~5.6 Contemporary Neo_metaphor2008전(인사아트센터)
  2010.8 한국가톨릭100인 초대전(대구경북디자인센터)
  2011  동원장복만 흉상제작
  2015 시민공원개장1주년기념전
  2015 craft recipe흙+나무 부산시립미술관기획초대전 
  2016 부산산업디자인전 심사위원
  2016 BFAA부산국제아트페어 부스전
  2016 울산최고장인심사위원
  2016 부산진구예술인회전
  2016 시민공원개장2주년기념전
  2016 동아대학교개교 70년 기금전  
  2016 가치있는 삶전-김해국제공항갤러리
  2016 수불스님 초상조각제작
  2017 대장경문화축전 생활속에 꽃피는 우리문화,예술전 
  2017 부산미술제
  2017 공예 예술전
  2017 동아도예가회40주년전
2017 부산진구문화예술인전
  2017 BFAA부산국제아트페어 부스전
  2019 동아대학교 개교70주년 전
  2019 부산미술제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초대출품
  2021 BAMA 아트페어

작품소장
   부산 남부민동 LG마린타워 도자조형물 설치
   양산대학 본관, 종합대체육관
   이천세계도자센터
   아르피나유스호스텔
   롯데마트 웅상점 조형물 설치
   양산성당 성모상 및 성물제작
   동원장복만 흉상제작
   동원정관2차 조형물 제작
   동원온천아파트 조형물 제작
   일본 성마리아 국제의료센터 작품소장
   가야테마파크도자조형물 제작
   김성수 통영옻칠관장 초상조각제작
   수불스님 초상조각제작

현재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회원
  부산도예가회 회원
  동아도예가회 회원
  TEAM(감성전달운동)회원
  경남 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
  동원과학기술대학교 교수역임
현/동아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감성공간연구소 대표

자기생성의 노출과 도약

색과 형태는 사물의 현실감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이세훈의 색과 형태는 현실의 일탈을 보여준다. 낡은 색, 무너진 형태, 깨어진 형상, 덕지덕지 묻은 이물감이 그렇다. 얼굴은 온전한 것이 없다. 깊은 선들로 난자당한 모습이거나 아예 한쪽이 떨어져 나가 얼굴을 찾아내기 힘들고, 겨우 눈이나 코, 입의 자국이 얼굴의 표정을 대신할 뿐이다. 어떤 표정도 목격하기 힘들다. 아예 표정 자체를 지우고 있다. 오랜 세월 묻혔다 발굴된 불상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 시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얼굴임을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온전해 보이는 인물상들은 다들 손을 가슴까지 올리거나 앞으로 깍지 낀 채 만나게 된다. 그것으로 <침묵의 소리>를 대신한다.

  이세훈의 이번 전시(2018.10.24-10.30. 서울인사아트센터 부산갤러리)는 인물이 주를 이룬다. 그 인물들은 지금의 사람이 아니라 고대인의 형상을 하거나 상투적인 도상을 보여준다. 오래된 시간의 무늬를 지닌 형상들이다. 시간의 흔적을 위해 때로는 도용의 흔적마저 거부하지 않는다. 현재의 인물, 지금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다소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도상이다. 그가 묘사하고 구축하는 인물이 눈앞의 인물, 구체적인 특정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인물들을 다소 익숙하고 도식적이며 개념적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새롭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형태도 색상도 조형적 의지도 별다른 점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보이는 인물은 익숙한 인상 사이에서 놓치고 있는 삶의 무늬를 보게 만든다. 익숙한 것에서 얻어지는 충돌의 어긋남이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작품에서 만나는 시간 무늬이다. 시간의 무늬는 완성 이후의 형태들이며, 지금의 시간으로는 미완의 순간이거나, 와해 되거나 해체된 낡은 색과 형상들이 띠는 양가성이다. 아직 형성을 다 끝내지 못한 상태로 완성으로 나아가는, 역으로 완성의 형태에서 해체의 상태로 나아가는 운동의 층위가 그런 점이다. 형태가 무너졌거나 색이 낡았거나 어딘가 충격으로 깨어졌거나 금 간 흔적들이 던지는 파열음, 오랜 시간 끝에 발굴된 것 같은 감각적 지점이 던지는 침묵이다. 

  그가 보이는 인물상은 대체로 3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는 구체적인 형상을 구축한 인물들로 온전하게 모습을 갖춘 도상이다. 둘째는, 인물상은 분명하나 얼굴이나 몸통, 손과 팔이 온전하지 못해, 미완의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셋째는 인물이긴 하지만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비구상적 특징을 기저로 한 것들이다. 이런 형상들에는 특별한 조형적 시도나 의지가 보이는 격렬한 태도가 없다. 그저 어디서 본 듯한 것들의 연속이다. 게다가 도조라는 일반적인 인상에서도 크게 벗어난 것 같지 않다. 환조나 부조 모두 비구상적인 형태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아가거나 구체적 형상에서 추상적 형태로 와해 되거나 해체되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인물을 소재로 했다는 외는 일관된 의지를 읽기 힘든 난삽함도 덧붙어진다. 그러나 그 양면성을 숨기려 하지 않고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의지의 배후를 묻게 되는 것이다

  환조로 된 작업은 온전한 형태를 가진 것이나 좌상처럼 얼굴이나 몸통에 심한 균열이나 박락이 있는 경우조차 <침묵의 소리>로 제시된다. 굳이 두 경향을 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제명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만 얼굴의 묘사가 대부분 생략되거나 심한 훼손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 연유를 숨겨두고 있는 셈이다. 미완의 형상은 가능성의 형태이자 해체의 형태로서 침묵을 목격하게 하는 통로다. 거친 채색(유약)의 흔적이 드러나고 묘사와 묘사를 벗어나는 사이에서 얻어지는 형상의 가능성과 비가능성이 그런 것이고, 묘사와 탈묘사라는 이중적 충동이 주는 양가적 감성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선의 불상이거나 나한상으로 보이는 좌상 <침묵의 소리>에는 아예 얼굴이 없다. 두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눈, 코, 귀 따위가 잘려나가고 없다. 어깨는 깨어졌고, 다리 위에 놓인 한 손 역시 깨어지고 없다. 거친 자국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흰색과 황색이 얼룩처럼 바탕을 드러내는 색조는 고대 도용을 보는 듯하다. 좌상에서 얻어지는 침묵의 목소리는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런 상투성이야말로 침묵의 여지가 던지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지점 아닌가. 그리고 그 지점이야말로 인간과 영성 사이에서 시간의 켜와 도약을 바라보는 작가의 의지를 목격하게 한다.

  다른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작업이 주는 상투성, 그것은 익숙하다는 다른 말이지만, 그 익숙함이 주는 친근감이나 통상적인 감정적 이해에서 느닷없이 만나지는 시간의 충돌이 이끄는 도약은 또 다른 힘이다. 통상적인 감성의 불협화, 익숙한 것 사이에서 얻어지는 생경한 충돌이다. 

  다른 하나는 부조로서 드로잉을 한 듯 자유로운 선과 형태들을 가지고 배치하는 <섬>이다. <섬>은 섬의 재현이나 인물의 단순한 구성적 배려가 아니라 배치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의미들을 생성하려 한다. 그 배치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남성이나 여성의 누드다. 단독자이거나 군상이다. 벽면에 이들 형상을 배치하면서 섬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인간을 불러내려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야말로 섬을 이루는 타자/시간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부조이긴 하지만 평면성이 강하다. 드로잉의 선조가 그런 인상을 강하게 하는 것 같다. 대상으로 드러나는 형태들에서는 구축적이기보다 해체적인 회화성이 돋보인다. 선들로 이루어진 형상들이 주는 인상은 구체적인 묘사 너머의 것에 시선을 두게 한다. 평면성에의 접근과 얼굴 없는 인물들의 비구체성을 통해 시간의 켜를 넘어서는 지점을 찾아간다. 평면성이 강한 부조는 환조의 구체적 형상이 던지는 환상과는 다르다. 그것이 묘사가 아니라 현실일탈의 지점으로 이끌어 준다. 선. 색조를 이끌어가는 드로잉, 손가락과 도구가 파고든 흔적들이 현실 바깥을 날카롭고 부드럽게 불러들인다.

   부조를 부착하는 방법의 편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체를 두 토막으로 나뉜 선들의 이접(異接)은 다른 것들을 접촉하는 방법이자 이접과 연접(連接)을 이끄는 내용이기도 하다. 미완이자 완성으로 나아가는, 이질성의 결합이 보여주는 힘, 운동감, 지향성을 한꺼번에 얻어내는 감각이다. 환조에서 보이는 미완의 영역은 이곳에서 나뉜 선과 결합의 선들로 연계성을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고 시간이 있다. 시간은 섬과 섬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그러나 그 섬은 사람의 시간으로 분절되어 있고 분절은 또 하나의 시간으로 이접(離接)과 접속의 양가성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곳에는 이접의 순간이 만드는 시간이 있고, 이접(異接)의 거부와 순접의 호응이 함께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고대와 현대의 시간이 겹쳐진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시간이 만드는 형상들, 미완의 형상들이 표정을 갖고 하나의 제스처가 되어간다. 이접으로 타자의 시간 속으로 이입해간다. 부조와 환조를 오가며, 형상과 탈형상을 오가며, 드로잉적 접근과 구축적인 형상에서 색과 형태는 사물의 현실감을 증폭시키고 현실에서의 일탈을 보여준다. 낡은 색, 무너진 형태, 깨어진 형상, 덕지덕지 묻은 이물감이 만드는 파열음이야말로 그가 던지는 통상적인 일상으로부터 도약하는 순간이다. 

환조든 부조든 성형토의 재료성을 드러내는 과감함은 물질성을 드러냄으로 묘사로부터 자 유롭고 도조적인 유약성분의 매끄러운 마무리에서 오는 상투적 인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인물이 던지는 익숙한 도상들의 충돌은 시간의 켜를 만들고, 현실에서의 일탈은 <침묵의 소리>와 <섬> 사이를 관계로 읽게 한다. 그러나 “작품은 메시지를 담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자기생산과정을 건설하고 보여주는 것”이라는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야말로 테라코타와 도조 사이에서, 이질적인 표현 재료들 전체를 가로지르는 침묵의 소리이며 또 하나의 도약의 지점일 것이다.
강 선 학(미술평론가)

작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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