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적으로 보자면, 새와 물고기와 같은 동물 세계, 기하학적 덩어리와 추상적 형태의 좌대가 합쳐져 하나의 개별화된 작품이 탄생한다.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입체 덩어리에 시선이 모아진다. 작품의 다른 요소-부분들보다 더 크고 표면의 이미지도 회화적이다. 점토로 구현된 덩어리들은 대부분 원형, 타원형, 도넛형, 사각형을 띈다. 나뭇가지. 누에고치, 구름, 맷돌, 호수, 돌, 우주, 달팽이 등 다양한 상상력도 놓치질 않았다. 보는 즐거움도 담보한다. 외관상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중후하면서도 선명한 색채와 표면에 스며든 추상적 이미지 즉 부드러운 선들이 은은한 한국적 미-김원용과 안휘준에 따르면 자연적이자 추상적인 미의 성격-도 비켜나질 않았다. 화려하지 않은 색채와 추상적 이미지가 첨가되어 단아하면서도 묵직하고, 단조로우면서도 정제되어 보인다. 자연에서 획득한 기하학적 형태의 덩어리들이 세워져 있고, 누워 있고, 받침대가 있으면서 작품의 부분으로 작용한다. 더더욱 나뭇가지, 누에고치, 구름, 멧돌을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덩어리가 다시금 추상적 형태의 좌대 위에 놓임으로써 부분과 부분이 합쳐진다. 인위적인 것이 제거된 덩어리 위에 살포시 놓인 새와 물고기가 자리해 마침내 작품으로서 완결된다. 동일한 형상의 새와 물고기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덩어리 자체는 이렇듯 어느 것 하나 부족함도 넘치지도 않는다. 단지, 도자작품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중심으로서, 나아가서 제작의 다양성을 보장할 뿐이다. 고대에서는 예술행위를 보다(theorein), 행하다(prattein) 그리고 만들다(poiein)로 보았고, 그리하여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으로 전개되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기쁨을 전달하는 것 즉 “작품은 하나의 생명과도 같이 그것에 고유한 즐거움을 산출한다.” 새와 물고기와 달리 구체성이 제거된덩어리들은 김현식의 정제되면서도 풍부한 도자세계와 작가만의 미적 전략을 펼쳐낸다. 김현식은 점토로 구현된 작품에 미적 중력을 첨부한다. 부분과 부분이 혼합하면서 발생한 미적 중력, 작가만의 고유한 미적 감각이다. 동물 세계-새와 물고기와 식물 세계-나무와 호수와 구름-의 만남, 그 찰나적인 순간이자 작가만의 고유한 완결미 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부분들 간이 합쳐져 생성된 시선의 방향에 따라 중력의 존재가치가 드러나면서 작품이 완결되기 때문이다. 읽어보자. 그의 근작은 인위적인 것이 제거된 덩어리 위에 놓인 새와 물고기가 시선의 방향을 지시한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혹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시선의 방향은 관람자의 몫이다. 수평적 시선의 이동이 그러나 덩어리의 정면성과 충돌하면서도 하나의 작품에 두 개의 시선이 공존한다. 동물 세계와 식물 세계와의 밀고 당김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김현식은 커다란 덩어리 위에 중앙도 외곽도 아닌 자리에 동물 세계를 배석시켜 마침내 작품으로서 완결된다. 도자-입체와 회화-평면, 구체성-동물 세계와 추상성-선적 이미지 사이에 위치한 미적 중력, 패턴화도 예측도 불가능한 작가의 고유한 감각이다. 점토로 구현된 부분들이 미적 중력으로 환원되면서, 바로 이렇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음을 드러낸다. 감각적 사유에 속하는 중력이 어디까지 포괄할까. 일상, 교육, 작가, 그 모든 세계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중견작가 김현식의 도자세계, 적지 않은 것을 제시한다. 교육자로서의 역할과 작가로서의 책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게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근작들은 그렇게 중후하면서도 선명한 색상을 수용했고, 부분과 부분들 간의 역동성은 오로지 도자예술의 과제가 아닐까. 점토로 빚어낸 새와 물고기가 작업의 모티브가 아니라 작품의 부분으로서 작용하고, 여기에 기하학적 덩어리가 첨가돼 비로소 자연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기가 온전해진다. 추상적 형태의 좌대가 작품의 부분으로서 어디까지 작용할지 그 의문은 남겨놓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대이자 밑받침의 형태가 추상적이고, 게다가 다양한 제작방식을 담보한다고 하더라도, 중견작가 김현식은 그만의 자연적으로 건조하고 기다리는 느림의 미학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