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7×60 백자슬립 색자토 2013 / 300
40×50×83 백자슬립 2013 / 300
41×37×60 백자슬립 색자토 2013 / 300
7×36×11.5 백자슬립 수금수은 상회 2018 / 60
24×8×35.5 백자슬립 수금수은 상회 2018 / 130
23×8×35.5 백자슬립 2018 / 100
10×23×72.5 백자슬립 2020 / 200
14×14×14 백자슬립 2020 / 150
16×17×14 백자슬립 색자토 2011 / 40
석고틀의 “유전자 조작전”
〈an epilogue〉
도예의 표현에서 석고틀 작업은 강력하고도 완벽한 복제력의 매력만큼이나 형태의 자유로운 변형에 제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허물고자 석고틀 게놈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고 생물의 형태와 특질을 결정짓는 염기서열의 재배치를 석고틀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DNA에 해당하는 보조틀과 모듈화시킨 사용형틀의 조합은 유전자 변이의 결과만큼 무한에 가까운 조형성의 확장을 확인 시켰다. 석고틀의 진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석고틀의 유전자 조작전”에서는 석고틀의 위치 변화가 가능하게끔 단순 분할하여 다양한 형태 변화와 더불어 텍스츄어의 선택도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선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하나의 틀에서 모듈의 작은 이동에 의한 변위와 내부보조틀의 조작만으로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제작 가능토록하기에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계속 일깨워주는 유희의 힘이 되고 있다. 나의 작품세계와 함께 내가 추구하는 흥미로운 방법들이 도예인들에게 교류되고 소통되어, 석고틀성형을 통한 도자조형세계의 구축에 좋은 응용의 원천이 되기를 원한다.
- 작가노트 중에서
작가에게 작품구입 상담하기
磁生体(ceramic organization series)
- 원초적인 바다, 우주적인 자궁 -
편의적인 발상이지만, 도예는 도기와 도조로 나뉜다. 기능에 방점이 찍히면 도기고, 조형에 무게중심이 실리면 도조다. 기본적으로 모든 도예는 도기와 도조를 포함하고 있고, 기능과 조형을 하나로 아우른다. 가장 기능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기능주의 미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상적인 사물이 그런 것처럼 기능과 조형이, 그리고 형식과 내용이 합체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럼에도 여하튼 도기와 도조를 구분해볼 수가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현대도예는 사실상 순수예술 내지 순수조형으로 봐야 할 도조를 도기와는 별개의 영역으로서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실생활에서의 쓰임새와는 다른 순수한 감상 내지 관상을 목적으로 한 영역으로서, 궁극적으론 도예의 범주를 확장하고 심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 구분을 따르자면 엄성도는 도기와 도조를 병행하고 있고, 그 와중에서도 특히 도조 쪽에 기량이며 상상력을 집중시키는 편이다. 작가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나 창작주체의 아이덴티티를 투사하는 것으로 치자면 아무래도 도기보다는 도조 쪽이 더 적절할 것이고, 실제로도 그래 보인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슬립 캐스팅 공법을 통해 크고 작은 비정형의 원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역 상감 기법을 통해 소지의 밑 색이 표면에 드러나 보이게 하는데, 대개는 땡땡이 문양들이고, 때론 소지가 품고 있는 일정한 색의 지층(레이어)이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원 형상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표면에 구멍을 뚫어 일종의 돌기(아님 촉수?) 형상을 부착하는데, 볼트와 너트를 이용해 관절과 관절을 안쪽에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긴 돌기 형상을 고정시킨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그 표면에 크고 작은 땡땡이 문양이 아로 새겨진, 그리고 길고 짧은 돌기 형상들을 무슨 메두사의 뱀 머리칼처럼 아우르고 있는 특유의 형상이 조형된다. 미색과 같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 은근한 색감으로 마감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눈에도 무슨 독버섯처럼 알록달록한 화려한 원색으로 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며 감각을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은근하고 우호적인 미감으로 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하면, 화려한 자태 속에 치명적인 독을 숨기고 있는 듯 시선을 사로잡는다(메두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시선을 잃는다). 극과 극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고나 할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존재의 양면성(아님 양극성)을 드러내고 반영한 경우라고나 할까.
돌기 아님 촉수 같다고 했고, 메두사 같다고 했고, 독버섯 같다고 했다. 비유가 지나치다 싶겠지만, 실제로 작가의 작업은 유기체를 닮았고, 생명체를 닮았고, 생물을 닮았다. 한갓 무기질에다 생명을 불어넣고 혼을 불어넣었다고나 할까. 여기서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붙인 자생체(磁生体)라는 주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생체는 도자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도자기 생명체?)는 뜻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생장하고 생육하는 생명체(自生體)를 의미하기도 한다. 뭐, 대충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하겠다. 중요한 것은 생명 내지 생명사상이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되고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생명은 무엇이고, 또한 도예와는 무슨 상관인가. 알다시피 도예는 흙과 불이 만나서 만들어진 예술이고 조형이다. 흙과 불이 만나는 경우로는 도예 말고도 또 있는데, 알다시피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흙으로 빗어 만든 인간형상을 불로 소성하는 과정은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에다 비유할 수 있고, 따라서 흙과 불의 만남은 도예를 비롯한 예술과 같은 창조적 행위의 메타포로 볼 수가 있겠다. 흙과 불이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 한갓 흙이 인간으로 변질되는 물질적(아님 보다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일종의 연금술적인 메타포로 볼 수가 있겠다.
흙과 불이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 한갓 흙이 인간으로 변질되는 물질적(아님 보다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일종의 연금술적인 메타포로 볼 수 있겠고, 그 과정에서 신이며 창작주체가 매개가 된다는 점으로 치자면 신화적 메타포로 볼 수가 있겠다. 자생체란 주제 자체는 살아있는 도예를 겨냥한 작가의 의지(도예를 대하는 작가의 입장이며 태도)를 반영한 것이지만, 이처럼 그 이면에서 도예의 기본이며 예술의 기원과 같은 창조적 행위의 메타포를 숨겨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생명 내지 생명사상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작가의 고백이 그 연유에 대해서 말해줄 것 같다. 이를테면 작가는 유년시절 곧잘 바다 속 깊은 곳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고, 수면 저 끝에 사는 물고기들을 관찰하곤 했고, 바다 속 심연을 들여다보며 우주와의 맞물림을 생각하곤 했다(작가는 부산이 고향이다). 사상이란 기억과 신념의 분별하거나 무분별한 혼합물임을 인정한다면, 유년시절의 기억이 각색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일종의 각색된 기억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분명한 것은 작가의 작업에 근간이 되고 있는 생명사상의 뿌리가 다름 아닌 유년시절의 기억이란 점이다. 유년의 기억이 무의식으로 스며든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주체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이 있고 자연스럽다. 아마도 그 기억은 유년의 기억을 넘어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이며 존재가 유래했을 원형적인 기억으로까지 소급시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바다 앞에 서면 여전히 아득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모든 바다는 원형적 바다인 탓에 일어나는 일이다.
바다에는 실제로 작가의 작업처럼 생긴, 혹은 작가의 작업과의 유사성을 떠올려주는 생물들이 많다. 이를테면 해삼, 멍게, 성게, 산호초 그리고 말미잘과 같은. 하나같이 원형의 몸통에 크고 작은 돌기며 가시들을 무슨 머리칼처럼 풀어헤치고 있는 생물들이다. 이 생물들은 형태도 그렇지만 특히 색깔은 살아있을 때와 죽었을 때, 그리고 물속에서와 뭍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물속에서 눈에 띠게 원색적이고 화려하고 생생하다. 작가의 작업이 이 생물들 그대로를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생물들에서 착상된 것일 수 있고, 최소한 무의식적인 기억의 형태로 각인되고 각색된 것일 수 있다. 마치 무중력 상태나 되는 것처럼 이 생물들이 부유하는 물속 정경을 들여다보면서 작가는 수면의 끝에 대해서 상상하고, 심연에 대해서 상상하고, 우주에 대해서 상상한다.
이런 연유로 작가에게 바다는 동시에 수면의 경계(존재의 경계?)며 심연이며 우주와 동일시될 수가 있었다. 모든 바다는 원형적인 바다라고 했다. 여기에 모든 바다는 우주적 자궁이라는 메타포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는 말하자면 생명의 원천이며 존재의 씨앗이고, 그 씨앗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자궁이며 우주다. 그래서 바다 속을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심연을 보고 우주마저 보아내는 작가의 상상력은 자연스럽다. 그 상상력이 존재가 유래한 근원(수면의 끝이며 존재의 경계)에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다.
모든 작업은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추상적인 작업은 물론이거니와 재현적인 작업도 마찬가지. 감각적 닮은꼴을 취할 수는 있어도 그리고 취할 때조차도 단순히 감각적 실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창작주체의 해석이 감각적 실재를 해석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해서, 돌기며 촉수로, 뱀 머리칼을 풀어헤친 메두사로, 독버섯으로, 그리고 각종 바다생물로 읽은 작가의 작업에 대한 해석은 일정하게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다. 어쩌면 작가의 조형은 이 모두를 싸안는 더 광의의 지평을 향해 열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 분분한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와중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유년시절의 기억이 작가의 작업의 원천이 되고 있고, 작가가 그 기억의 보고인 바다에서 심연을 보고 생명을 보고 우주를 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바다는 그 속에 생명을 잉태한 우주적 자궁일 수 있고, 이 우주적 자궁을 작업으로 풀어낸 것일 수 있다. 그렇게 풀어낸 원초적인 바다며 우주적인 자궁이 품고 있는 정경이 감각적으로, 유혹적으로, 그리고 때론 치명적으로 와 닿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도예도 때론 이처럼 감각적이고 유혹적이고 치명적일 만큼 섹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시해준다. 도예의 표현이며 감각의 지평을 확장시켜줄 성과로 봐도 되겠다.
- 2013. 11. 고충환 미술평론가